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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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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 인생의 거센 풍랑 앞에서, 통권 제 5권 9호, 2026년 5월 18일

인생의 거센 풍랑 앞에서 “이제는 기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라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은 알겠는데,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가장 강력하게 일하시는 때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선포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못할 때에도, 내 안의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고 계십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가 낙심할 때 “너는 끝났다”며 참소하지만, 성령의 탄식 소리는 그 거짓을 파하고 우리의 영을 다시 깨웁니다. 내 힘이 아닌 성령에 이끌려 다시 무릎 꿇을 때, 우리는 환경을 뛰어넘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위로와 만지심은 ‘목장 모임’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성령님의 탄식으로 겨우 숨을 쉬며 목장 모임에 나아갔을 때,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고 손 잡아주는 지체들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온몸으로 경험합니다. 골방에서 성령님이 내 영을 심폐소생술 하셨다면, 목장 모임은 그 숨을 가지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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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 제 5권 8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 놀라운 영적 신비가 일어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영원히 거주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고, 이 영역은 그 어떤 악한 영도 감히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빛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여전히 의문을 가집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왜 나는 또다시 같은 죄와 상처 앞에 무너지는가?”

이유는 우리의 ‘영’은 즉각적으로 구원받아 거룩해졌지만, 우리의 생각과 감정, 삶의 습관을 담는 ‘혼과 육’의 영역에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쓴 뿌리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계시는 거룩한 집 한구석에, 우리가 미처 치우지 못한 ‘영적인 쓰레기’들이 쌓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악한 영들은 바로 이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죄의 흔적들을 통로 삼아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고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이 내면의 어두운 방들을 청소하고 영적인 쓰레기를 치우는 실제적인 힘은 어디서 올까요? 일차적으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우리 일상으로 끌어오는 가장 강력한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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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 기도의 시간, 제 5권 7호, 5월 7일 목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가벼운 눈빛이나 짧은 감탄사만으로도 모든 마음이 전달되곤 하죠. 성경이 말하는 ‘방언’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그 친밀한 사귐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소통 방식입니다.


​방언은 내가 이해하는 단어의 한계를 넘어가는 기도입니다. 때로는 내 이성이 "감사합니다"라는 한 문장에 머물러 있을 때, 내 영은 방언을 통해 그보다 훨씬 깊고 풍성한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라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내 지식의 경계를 넘어 성령의 파도를 타고 하나님 마음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묻습니다.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하지만 방언은 논리의 대화라기보다 '사랑의 언어'에 가깝습니다. 구체적인 문장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흐르는 깊은 신뢰의 표현이죠.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옹알이를 할 때, 부모는 그 소리 속에 담긴 기쁨과 욕구를 다 알아듣고 미소 짓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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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방언이 뭐지? 제 5권 6호, 4월 29일 수

방언을 떠올리면 어떤 사람은 신비를, 어떤 사람은 부담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앙의 '레벨 업'처럼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를 그렇게 긴장된 주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꽤 현실적으로 바라보며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은 사람들이 실제로 알아듣는 언어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였죠.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교회 안에서 방언이 넘치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바울은 방언의 본질을 분명히 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말, 즉 개인적인 영적 소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깨달은 다섯 마디가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 여기서 기준이 나오는데 그것은 '개인의 체험'보다 '공동체의 유익'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방언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질서를 강조합니다. 결국 문제는 방언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우월감도, 강요도, 무시도 모두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방언은 겉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말을 하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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