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신학자들이 하는 말 중에, 기독교 영성은 ‘수도원 영성’이 아니고 ‘현장의 영성’이란 말을 합니다. 중세 시대 암흑기에 수도원이 그 꺼져가는듯한 등불을 지켜주고, 영성의 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영성은 수도원이 아닌 현장으로 나가야 더 살아납니다. 예수님 오실 때 세례 요한은 무모하리만큼 광야에 나가서 외쳤습니다. 대도시나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면 듣는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 외침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려오고, 회개하며 영적인 목마름을 채움 받으려 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성전보다는 오히려 삶의 여러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셨고 사역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으로 사람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게 당연한 것이 지금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은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보다는 비신자를 대상으로 사역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모습을 보면 신자들과의 교제가 비신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예수님과는 반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영적 충전을 받고 도전받는 게 있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충전 받았으면 나가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비신자를 찾아다니고, 만나고, 기도해줘야 합니다. 그들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기는 쉽지 않고, 비신자들은 인생의 해답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적극적으로 비신자를 찾아가 만나고, 기도해줘야 합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기도해주면 효과 있겠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해보십시오. 의외로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기도해준다 했을 때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기도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 줄 수 있는 게 기도와 복음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자세히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가 시작되고, 뭔가 모를 마음의 깊은 터치가 이루어집니다. 이걸 전해줘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두 명의 비신자를 만났습니다. 한분은 부모님이 불교 신자라서 교회를 싫어하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 대화 중 이 분이 불면, 스트레스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고, 대화 끝에 “제가 한번 기도해드리고 싶다고, 기도해도 될까요?” 했더니 “기도해주시면 좋지요.” 했습니다. 기도했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이 된다면서 앞으로 힘들 때는 자주 기도 받아야겠다고 합니다. 기도해드린 두 분 다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손을 얹거나, 잡거나, 기도할 때 그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일하시고 계시니 담대히 기도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